2007. 9. 11. 12:30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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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사람들은 입을 모아서 '인간은 사고를 할 수 있다'라고 답합니다.


그러나 저는 인간과 동물의 차이점은 '용서의 능력'이라는 데서 찾고 싶습니다. 인간은 용서하고 용서받을 수 있지만 동물은 그럴 수 없습니다.

IQ가 높은 동물들은 저능하지만 사고를 합니다. 동물 관련 TV프로그램이나 서커스에 나오는 동물들은 숫자 1을 집어오라면 오랜 교육에 걸쳐서라도 숫자 1을 찾아서 가져오곤 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주인이 집에서 나갈 줄 알고 스스로 케이지에 들어가기도 하고, 멀리서 주인이 오는 소리만 듣고도 반가워 소리내기도 합니다. 이들은 모두 사고를 합니다. 또한 동물은 감정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쩔 수 없이 내다 팔려고 장에 나가는 주인의 맘을 읽고 소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주인을 쳐다보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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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용서는 어떠합니까?

본능을 따라 살아온 동물에게 용서란 없습니다. '어제 너의 먹이를 먹은 건 미안했어'라면서 오늘의 먹이를 사냥해서 들이미는 동물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거스르면서까지도 은혜의 힘을 입어 누군가를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가졌습니다.

인간은 동물과 구분되게 '용서'할 수 있습니다.

사전을 찾아보면 용서'지우다' 혹은 '떨쳐 버리다', '멀리 보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용서, 상처를 치유하는 사랑>이라는 책에 따르면, 용서는 다음의 세 가지 경로를 거쳐 이루어진다고 합니다. 첫째,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만을 따로 구분하여 과거의 일로 묶어 둡니다. 둘째, 그 과거의 사실에 연루된 일체의 감정적 반응을 떨쳐 버립니다. 셋째, 원상회복되는 데 필요한 대가를 생각하면서 복수하겠다는 마음을 지워버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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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용서'라는 단어가 마음을 울린 적이 없습니다.


'내가 이번만큼은 용서해주지'가 아닌 마음으로부터의 '용서', 감정적 반응을 떨쳐 버리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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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Favicon of http://read-lead.com BlogIcon Read&Lead 2007.09.22 22:36 address edit & del reply

    감정에 치우쳐서 중요한 것을 놓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평온한 감정을 컨트롤하고 평안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해야 진정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거라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 Favicon of https://juejenny.tistory.com BlogIcon 至柔제니 2007.09.26 10:44 신고 address edit & del

      별말씀을요. 저도 덕분에 글을 다시 읽어보니, 실천이 참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도 다시 마음을 다져야겠습니다.

2007. 6. 25. 12:54

[Movie Review] 밀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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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지는 좀 됐는데, 쉽사리 글로 정리하게 되지 않아서 시간이 흘러버렸다. 한편 영화의 내용이 종교적인 내용이라 읽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의 문제에 조금은 염려가 되었다. 어찌되었건 블로그가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표현하는 창구의 역할을 하고 있어 그런 염려를 살짝 접어두기로 했다.

내게 영화<밀양>은 몇 가지 키워드로 정리가 되었는데, 그것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용서, 구원, 신과의 대립, 인정의 욕구 등이다.  

기사에서는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두고 '용서
'라는 화두에 직면한 학원강사 신애(전도연)와 그녀를 사랑하는 카센터 사장 종찬(송강호)의 이야기라는 소개가 나왔었는데, 표면적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이 영화의 원작은 소설가 이청준의 단편<벌레이야기>라는 글이었다고 한다. 그 글을 이창동 감독이 영화화하면서 영화의 배경을 밀양으로 정했다고 들었다. 비밀 밀 자에 볕 양 자를 쓰는 밀양의 영문 풀이가 secret sunshine으로 나오기도 하거니와, 영화의 내용과 그 이름이 잘 어울리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 비밀스러운 햇빛. 작가는 감독은 무슨 얘기를 우리에게 걸어오고 있는 걸까?

영화를 막 보고 났을 때, 나는 이 영화가 '용서'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아들을 죽인 유괴범을 용서하려고 교도소로 찾아간 신애의 앞에는 범죄자라고 하기에는 얼굴이 너무 편안해 보이는 유괴범이 자리를 잡고 앉는다. 그녀의 얼굴에 불쾌한 것을 억누르는 빛이 스친다. 그녀는 유괴범에게 당신을 용서했고, 내가 알고 있는 신(하나님)을 전하고자 왔노라 말한다. 용서와 함께 신앙을 전하는 그녀는 마치 인간의 한계를 넘어버린 것 같았다.

그때 신애의 예상을 뒤엎는 일이 생겼다. 그것은 유괴범이 교도소에서 이미 그 신(하나님)을 만나 신으로부터 죄에 대한 용서를 받았고 죄로부터 자유하게 되어 마음이 평안해졌다는 것이다. 교도소 안에서 당신을 위해 기도했노라고 말하는 그를 바라보며, 그녀는 어떻게 내가 용서하기도 전에 신이 먼저 용서했는지에 대해 분개한다. 그리고 그 분을 이기지 못해 교도소를 나와서 쓰러져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녀의 반항은 시작된다.

여기서 나는 이 영화가 용서를 도구로 인간의 뿌리깊은 죄성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생각됐다. 모두가 만류하는데도 불구하고 교도소로 찾아갈 필요가 있었는가? 그녀는 어쩌면 용서보다는 인정의 욕구, 즉 내 신앙은 내 아들을 죽인 살인자를 사랑으로 감쌀 만큼 깊다는 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욕구에 있지는 않았을까? 신과 인간의 용서에는 순서가 정해져 있는가? 누가 누구의 스케줄에 맞춰 진행해야 하는가? 설령 신이 자신보다 더 먼저 용서했다고 해서 그토록 제자리를 찾지 못해 방황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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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보면 비슷한 상황이 나온다. 얼떨결에 살인을 한 강동원이 사형수로 교도소에 갇혀있을 때 죽은 사람의 어머니가 강동원을 용서해주겠다면서 교도소로 찾아온다.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왔음에도 그녀는 강동원에게로 달려가 그를 때리면서 목 놓아 울고 만다. 그러자 강동원은 울면서 잘못했다는 말을 계속 되뇌였었다. 잠시 뒤, 어머니는 강동원을 향해 용서를 한다고 와서는 이렇게 대해서 미안하다고 말한다.

누군가를 용서한다는 것은 분명 쉽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용서가 결국은 자신을 위해서 필요한 과정의 하나라는 것을 나는 오랜 삶의 경험 끝에 깨달았다.

다시 내가 이해한 영화 이야기로 돌아와서 그녀의 남편은 불륜을 했고 교통사고로 죽었다. 그녀는 어쩌면 주변의 시선이 부담스러웠고, 현실로부터 도피하고 싶었다. 그래서 영화의 제목이자 지명처럼 그녀의 삶에 '비밀스러운 햇살'을 원했다. 그래서 남편의 고향에 내려와 정착하고자 했다.

그러나 현실은 좀 달랐다. 무리에 동화되고 싶은 그녀와 이방인에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은 지역민들. 그녀는 사람들과 동화되기 위해 땅을 산다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다닌다. 이 허세가 미끼가 되어 그의 아들이 유괴되고 결국 죽고 만다.

그 맘때쯤, 교회에 다니는 한 사람이 교회에 한번 와보라고 권유하게 된다. 보이는 세계 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음을 소개 받는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극한의 고통 앞에 한없이 연약한 한 인간으로 선 그녀는 무기력하고 자신을 놓아버릴 듯 불안하다. 교회를 찾은 그녀는 신 앞에 고통을 내려놓고 싶어 갈구한다. 그리고 신앙을 매개로 지역 공동체에 합류하게 된다.

신앙에 있어 가장 낮은자/나중되었던 자가 신을 전하는 자가 되어 우쭐해지고 있었다. 겸손과 교만이라는 날선 검 위에 그녀는 곡예를 하듯 서 있었다. 그리고 이 때 교도소에 찾아가 용서의 문제와 대면하고 패배하게 된다.

신과 대결하고 반항하는 무기력한 인간. 영화의 후반부로 달리면서 신에게 반항하며 부서져가는 자아를 표현하면서 영화는 결론을 맺지 않고 공허함을 남겨두고 끝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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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는 중에도 그렇게 생각했지만, 영화를 보고 시간이 지나면서 개인적으로는이창동 감독이 안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의도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그린 영화 속 예배들은 아우라가 빠져있었다. 껍데기/형식만이 남아있는 예배. 나는 신앙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보일 수도 있겠다고 이해하면서도, 영화 속에서 전도연이 과연 신앙을 제대로 가질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겼다. 겉모양만이 남아있는 예배 가운데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는 일들이 가능하지 않을 것 같다는 내 생각 때문이다.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밀양'을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거다. 하느님께 분노하는 것조차도 인간의 일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인간은 자기 문제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야만 한다. 또한 자기가 살고 있는 땅이 정말 아름답고 살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기에 있기 때문에, 누추해 보일 수도 있지만 이 땅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렇다.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살아야한다. 신에게 분노하는 것도 인간이니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은 자기 문제의 해답을 스스로 찾아야만 하는 것일까? 이해할 수 없는 남편의 외도, 감당할 수 없는 아들의 죽음, 외지에 홀로 남겨진 그녀에게 스스로 답을 찾을 힘이 있을까? 그래서 그녀는 자살을 시도했던 것일까?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그러기에 신앙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신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게 하고, 용납할 수 있게 하는 힘을 준다. 그로 인해 목적의식을 갖고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끝으로 소설가 이청준은 원작의 제목에 왜 <벌레 이야기>라는 이름을 붙였을까? 그것은 나이가 들거나 신앙의 힘을 빌어도 여전히 정제되거나 성숙되지 못하고 뿌리 깊은 죄성을 가진 벌레보다 못한 인간을 빗대고 싶어서는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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